올해는 세계 협동조합의 해다. 우리나라에서도 연말부터 다섯 명 이상 모이면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협동조합 기본법이 시행에 들어간다.

협동조합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CBS 노컷뉴스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세계 곳곳에서 성공을 거둔 협동조합을 직접 취재했다, 그리고 이들의 성공사례가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에는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편집자 주]

◈ 협동조합은 결국 커뮤니티 협동경제

일본 카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에 사는 직장인 사노우 카즈키 씨는 지난달 귀찮은 에어컨 청소를 전화 한 통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자신이 가입한 협동조합에서 제공하는 생활 지원 서비스를 이용한 것이다. 비용도 1,000엔 (1만 4,000원)으로 저렴했다. 사노우 씨는 가끔 밀린 청소를 이렇게 처리한다.

사노우 씨가 가입한 협동조합은 지역에서 필요한 서비스 등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해 주는 '복지클럽생협'이다. 지난 1989년 처음 설립될 당시에는 안전한 먹거리의 공동 구매가 우선 사업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주민들이 '있었으면 하는 서비스'로 사업이 확대됐다. 예를 들어 식품을 배달하다 보니 아예 조리된 도시락을 원하는 조합원들을 발견했고, 이후 탁아와 노인 돌봄 서비스에 대한 니즈가 크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조합원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하나씩 사업으로 만들다보니 지금은 18개 분야로 늘었고 1만 5,000여 명의 조합원은 일반 시장 가격의 50~70% 수준으로 각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서비스 종류도 다양해 어린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콘서트에 데려다 주는 등 일회성 서비스도 가능하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서비스의 가격 결정 방식이다. 이곳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나중에 자신도 똑같은 서비스를 받는다고 가정한 뒤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가격이 결정된다.

복지클럽생협의 하세가와 아쯔시 이사는 "여기서는 일이 고용, 피고용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순환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며 "따라서 자신이 이용자가 됐을 때 적정 수준이 얼마인지를 생각해 지역 주민들이 가격을 정하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노인 돌봄 서비스의 경우 지역 내 건강한 조합원이 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 조합원은 나중에 자신이 늙고 힘들어져 같은 서비스를 받아야 할 때를 감안해 가격을 정한다는 것이다. 서비스를 제공해 돈을 번다기보다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 실제 복지클럽생협이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경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지역 사회에 공헌하려는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한 잣대가 된다.

하세가와 이사는 "인터넷이나 편의점이 발달하면서 지역 내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해졌지만 지난해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지역 사회의 중요성에 대해 재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난이 발생할 경우 교통마비 등으로 외부 도움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진다. 따라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지역 내 문제 해결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하세가와 이사는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 타시마 야스토시 사무국장은 "일본 경제가 침체기로 접어들면서 협동조합의 사업 내용이 지역 주민과 협력하는 복지 사업으로 변화했다"면서 "커뮤니티 협동경제 체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 눈폭풍이 가져다준 협동조합 '녹색의 집"

1998년 1월 겨울을 맞은 캐나다 퀘벡 지역에는 거대한 눈폭풍이 닥쳤다. 눈이 쌓여 얼음이 언 곳에 다시 눈이 쌓이기를 반복하면서 송전선이 눈과 얼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뚝뚝 끊어졌다. 몬트리올을 비롯한 퀘벡 지역에 한겨울 최악의 정전 사태가 닥친 것이었다.

몬트리올에서 며칠째 정전이 계속되고 거리에는 눈이 쌓이면서 마을이 고립됐고, 지역주민들은 스스로 협력해서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마을 주민들은 난로를 때우며 한자리에 모여 서로 음식을 나누고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내갈지 머리를 맞댔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지역의 이웃들이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은 마을 주민들은 눈폭풍 사태가 해결된 뒤에도 계속 모임을 유지할 필요를 느꼈다. 언제든 위험이 닥치면 또다시 단결할 수 있도록 평소에 교류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는 데 몇몇 주민들이 공감하면서 협동조합 '녹색의 집'(Cooperative La Maison Verte)이 설립됐다.

마을주민들이 서로 모여 이야기하던 그 자리에 세워진 녹색의 집은 처음에는 25명의 회원으로 시작된 작은 모임이었다. 조합원들이 모여 커피를 나눠마시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페가 만들어졌다. 조합원(가입비 10불)들에게는 커피 값을 할인해 주던 카페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조합원도 한 달에 30명꼴로 늘어갔다.

조합원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친환경 상품을 카페에 갖다놓기 시작했고, 이것은 다시 카페 내 매장으로 발전했다. 지금도 '녹색의 집'에서는 여전히 커피와 차를 팔고 있지만, 절반 이상의 공간이 이제는 유기농 농산물과 친환경 공법으로 제조된 상품 등을 진열한 매대가 차지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필요로 세워진 협동조합답게 '녹색의 집'은 딱히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조합원들의 교류의 장이다. 할인된 가격으로 커피를 마시고, 필요한 물건을 적당한 값에 사는 것은 물론, 그곳에 온 조합원들과 이런저런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매장 한쪽에는 지역 소식을 담은 각종 전단지와 정보들이 빼곡하고, 소규모로 마련된 도서관도 있어서 지역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책을 읽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지역 소통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마케팅 담당인 파스칼린 말러윈(Pascaline Malouin)은 "녹색의 집 매출의 85%가 조합원들에 의한 것"이라며 "충성도 높은 조합원들을 고객으로 확보해 불황을 덜 타는 것이 협동조합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또 "녹색의 집은 주민들의 공간이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맞춤식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녹색의 집'은 그야말로 눈폭풍이라는 재난이 서로 돕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우면서, 지역 공동체에 선물해준 소통공간인 셈이다.

◈ 재정자립도 100%, 협동조합 500개가 형성한 도시, 트렌토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트렌토는 이탈리아 전체 면적의 2%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지역이지만 재정 자립도는 100%다. 협동조합 때문이다. 500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연대하여 지역의 재화와 서비스, 일자리 등을 창출하며 지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협동조합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트렌토는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암울한 도시였다. 1802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1870년부터 1888년까지 주민 40만 명 중 2만 4,000여 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가톨릭 사제 돈 로렌조(Don Lorenzo Guetti, 1847~1898) 신부가 가난을 해결하고자 독일의 신용협동조합 시스템을 배워 트렌토 지역에 도입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1890년 첫 번째 신협과 생협이 트렌토에 탄생했다.

협동조합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10년 만에 조합 수가 170개를 넘고, 조합원은 2만 명을 넘었다. 현재(2012년 5월 기준)는 총 536개의 단위 협동조합이 있으며, 25만 5,000여 명의 조합원이 있다. 트렌토 인구가 약 53만 5,000명이니 지역민 절반이 조합원인 셈이다.

크게 나누어 보면, 농업협동조합이 92개, 신용협동조합이 57개, 소비자협동조합이 79개, 노동·사회적 서비스·주택협동조합이 295개다. 그 외 나머지는 콘소시움의 역할을 하는 중간 서비스 단체 협동조합이다.

지역시장 점유율 역시 막강하다. 농업협동조합은 시장의 90%, 신용협동조합은 시장의 60%를 차지한다. 소비자협동조합은 38%를 차지한다.

단위 협동조합의 종류도 다양하다. 농업, 은행, 매점은 기본적인 것이고 장인, 목수, 운수, 와인, 고기, 광고, 식당, 주택, 환경, 에너지, IT, 유제품, 생선, 교사 등 일일이 세는 것이 힘들 정도다.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지역 차원의 연맹체로 강력하게 연대한다. 연맹체인 트렌토협동조합연맹(Federazione Trentina della Cooperazione)은 소속 협동조합의 경영 상태를 파악하고, 협동조합 정신에 맞게 운영되는지 감사하는 일을 한다.

연맹은 모든 조합의 이윤 3%를 모아 협동조합 발전기금을 위한 펀드를 만들고, 이 자금을 새로운 협동조합을 설립하거나 운영이 어려운 협동조합에 빌려주는 데 쓴다.

유럽의 경제 위기 속에서 지난해 트렌토에서만 581개 기업이 문을 닫았지만, 협동조합은 단 1개만 문을 닫으며 폭풍우를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트렌토협동조합연맹 파올로 토넬리(Paolo Tonelli) 대표 대변인은 "개인의 이익보다 조합의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협동조합의 정신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